청년중심의 창의도시로 변모한 스웨덴 말뫼시의 수변경관 (photo by Spacecreator) 연구실 문을 나서는 제자들의 뒷모습 대학에서 2월은 이별의 아쉬움과 새로운 만남의 설렘이 교차하는 복잡한 시간이다. 4년간의 정든 학업을 마치고 사회로 첫발을 내딛는 졸업생들을 떠나보내고 나면, 곧바로 새로운 기대를 품고 들어올 신입생들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 인사를 위해 연구실을 방문하는 제자들과의 대화는 늘 칭찬과 덕담으로 시작된다. 지난 4년 동안 보여준 제자들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거친 사회생활에서 승승장구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이 따뜻한 대화의 끝은 대부분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정한 패턴으로 마무리되곤 한다. "앞으로 어느도시에서 일할 계획이니?"라는 나의 의무적인 물음에, 제자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울에서 취업하고 싶어요!"라는 당연한 듯한 대답을 내놓기 때문이다. 아쉬운 작별 인사를 뒤로하고 연구실 문을 나서는 제자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의 마음 한구석에는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얹힌다. ‘우리 울산은 과연 누가 지킨다는 말인가?’라는 서글픈 질문이 맴돌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울산을 위해 누군가는 남아야 하고, 누군가는 남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대한민국은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국가인가?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은 ‘도시국가’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인구는 이미 2020년에 비수도권 인구를 추월했다. 5,200만 명에 달하는 전체 인구 중 약 900만 명이 서울에, 인천과 경기를 포함한 수도권 전체에는 2,600만 명 이상이 밀집해 있다. 즉, 우리 국민의 67%에 해당하는 3,500만 명이 서울과 그 인근 권역에 모여살고 있는 셈이다. 이런 수도권 집중도는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해 봐도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극심하다. 독일 베를린 광역권의 인구 비중이 전체의 7%, 프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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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생포문화창고 지관서가에서 바라본 장생포항 모습 (Photo by Spacecreator) |
도시의 정체성을 담는 그릇, 공간
도시는 수많은 공간의 집합체로 이루어진 거대한 유기체와 같다. 울산이 지향하는 '매력적인 도시'라는 목표는 화려한 구호만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 도시만이 가진 고유한 정체성을 담은 공간들이 도시 곳곳에서 저마다의 매력을 발산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울산에서는 장생포 문화창고와 그 안의 지관서가 북카페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모든 인프라와 문화적 역량이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오늘날, 지역의 정체성과 매력을 오롯이 담아낸 공간을 발굴하고 창조하는 일은 도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과제다. 이것이 우리가 울산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울산다운 공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무엇을 '울산답다'라고 말하는가? 높이 솟아오른 공장 굴뚝과 실핏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파이프라인, 거대한 골리앗 크레인과 해안가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 그리고 [산업단지의 무표정한 경관들]—이것은 오랫동안 울산을 상징해 온 풍경이었다. 그런데 이런 울산의 산업적 유산을 고요히 품으면서도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은 공간이 있다. 바로 장생포 문화창고다.
냉동의 기억에서 문화의 숨결로
장생포문화창고는 과거 수산물을 가공하고 보관하던 '세창냉동'의 건물이었다. 경영 악화로 문을 닫은 뒤 무려 20년 동안이나 버려져 있던 이 거대한 냉동창고는 이제 시민들을 위한 문화시설로 재생되었다. 육체의 허기를 채우던 수산물 창고가 인간 영혼의 양식을 제공하는 문화의 창고로 변신했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면서도 감동적인 서사를 전해준다.
국내의 많은 도시가 폐쇄된 산업 시설을 문화 공간으로 재생하고 있지만, 장생포 문화창고는 그들과 궤를 달리하는 명확한 차별점이 있다. 서울이나 부산의 많은 재생 공간은 주변 환경이 이미 완전히 도시화해 과거의 역사적·장소적 맥락을 상실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장생포 문화창고는 여전히 활발한 생산 활동이 이루어지는 거대 산업단지와 역동적인 어항의 교차점에 자리 잡고 있다. 공간의 역사와 주변 환경의 맥락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 이곳만의 독보적인 매력이다.
한때 영하의 온도로 차가운 냉동의 기억만을 품고 있던 이 콘크리트 덩어리는 이제 따뜻한 문화의 온기로 가득 찼다. 생업의 고단함과 동결된 침묵만이 가득했던 창고 안에는 이제 오케스트라의 장엄한 선율과 사람들의 온기 어린 대화가 흐른다. 죽어 있던 공간이 다시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공간'으로 부활한 것이다. 디트로이트가 보여준 [도시 몰락의 그림자]와 달리, 장생포의 작은 부활은 산업 도시가 어떻게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는지 보여준다.
북카페 창가에서 마주하는 경이로운 풍경
장생포 문화창고에서 가장 극적인 경험을 선사하는 곳은 단연 북카페다. 시원한 커피 한 잔과 마음을 달래주는 수필집 한 권을 들고 창가에 앉는 순간, 유리창 너머로 펼쳐지는 풍경은 경이롭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다. 창밖에는 거대하고 복잡한 근육질의 화학공단 설비들이 압도적인 위용으로 서 있고, 그 사이로 생명의 바다가 길게 뻗어 있다. 저 멀리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맥과 하늘은 이 이질적이고도 혼란스러운 부조화를 묵묵히 감싸안는다.
강렬한 산업단지의 이미지와 잔잔한 해변의 풍경은 신기하게도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화학공단의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마저도 이곳에서 바라보면 한 폭의 정물화처럼 느껴진다. 누군가에게는 삭막한 회색빛 풍경일지 모르나, 이는 울산의 정체성과 기억이 고밀도로 응축된 가장 '울산다운 장면'이다.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은은한 커피 향, 그리고 창밖의 오묘한 풍경이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울산 그 어느 곳에서도 경험하기 힘들다. 성공적인 도시재생 사례로 손꼽히는 서울 성수동의 카페나 부산의 폐 공장 서점, 제주의 방앗간 베이커리에서도 이런 독창적인 오마주(Hommage)는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울산만이 가질 수 있는 조형성과 풍경의 조화,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삶의 무게가 이곳에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울산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
장생포 문화창고에 들어서는 것은 자연과 산업, 과거와 현재, 그리고 기억과 상상이 겹치는 경험이다. 마치 오래된 사진첩을 넘기듯 고래잡이의 기억과 중화학 산업의 눈부신 성장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이곳은 단순히 재생된 건축물이 아니다. 울산이 자신의 역사를 어떻게 재해석하고 있으며, 미래를 향해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이곳은 그 어떤 화려한 전시나 홍보 영상보다 더 강력하고 명확하게 울산의 가치를 설명해 준다. 과거에는 치열한 삶의 일터였고, 지금은 시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쉼터가 된 이곳에서 우리는 울산의 새로운 미래를 상상한다. 장생포 문화창고 북카페 창가에 앉아 마주하는 감동의 순간들이 울산 곳곳으로 확산해야 한다. 이런 [울산다운 공간]들이 더 많이 만들어질 때, 울산은 비로소 누구에게나 자랑하고 싶은 품격 있고 매력적인 도시로 완성될 것이다.
